발레리 티 리 《우리는 젖은 단어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Valerie Tee Lee 《We made the tools to bring wet words home》

2025.05.17. - 05.27. 10:00-19:00
예술공간 [:틈] 마포구 월드컵로 31길 6, B1


우리는 젖은 단어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이야기는 물이 담긴 가방에서 출발했다. 어슐러 K. 르 귄은 엘리자베스 피셔의 인류학적 이론을 빌려 예술의 기원을 가방(carrier bag)으로 상상했다. 인류의 시작을 떠올릴 때 우리는 돌칼이나 막대기와 같은 파괴의 수단을 연상하지만, 르 귄이 주목한 것은 안이 빈 통이나 움푹 패인 그릇처럼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도구였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바닷가에서 채취한 해조류, 곡물이나 잎사귀를 가방에 넣어 안전한 장소로 돌아왔다. 그들이 담아온 음식과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면서 연대에 기반한 관계가 희미하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칼이 쓰는 수직적이고 선형적인 역사와 달리, 그릇 주변에 모이는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확장된다. 가방 안의 단어는 바다 안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존재처럼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발레리 티 리 세계는 다양한 이야기와 시간이 교차하는 바다로 뻗어 있다. 그는 인간과 비인간, 기록되는 말과 지워지는 말의 명확한 경계를 문지르며, 억압되어 온 주체들의 웅얼거림과 속삭임, 피어나오는 이야기들을 자연적으로 분해되는 재료와 가변적 설치로 포착해 왔다. 발레리 티 리는 작은 서사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가라앉는 공간으로 바다를 다시 발견한다. 바다를 맞닥뜨릴 때 느끼는 대양감(oceanic feeling)은 ‘내’가 세상 바깥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아득한 감각이다. 자칫 떨어져서 흡수될까 두려운 마음은 절벽 위에 의기양양하게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개척자로서의 뒷모습에서도 비친다. 그러나 이 감각을 바다의 모든 시간과 공간 안 무수한 생명들 사이의 느슨한 연결로 읽을 수도 있다. 바다를 통과해 흐르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는 무한함 안에서 주체의 존재가 사라지는 막막함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존재와 끊을 수 없이 이어져 있다는 결속감에 가까울 것이다. 에리카 발솜의 말처럼, 바다는 지극히 친밀하고 미시적인 이야기가 흐르는 구체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바다는 정해진 때에 맞추어 열리고 닫힌다. 어떤 바다는 품고 있는 이들에게 비밀을 공유한다.

전시는 거대한 바다에 접근하는 내밀한 통로에 가깝다. 서로를 가로지르며 바다에서 자라나는 몸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붉은 수체(水體)〉(2025)의 관은 양식장에서 사용되다 폐기된 호스이다. 호스의 갈라진 틈은 말린 우뭇가사리로 덧대어져 다시 통로의 형태를 되찾는다. 자연을 활용하기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플라스틱은 자연물인 해조류의 물성과 낯선 빛을 머금으면서, 아주 오랫동안 바다에 속한 존재로 현현한다. 빛을 투과시켜 그림자로 흔적을 남기는 〈나의 몸은 물의 기억을 담고 있다〉(2025) 역시 누군가를 포집하는 도구인 어망과 바다에서 태어난 존재의 경계를 흐린다. 바닥/바다에 누운 호스 사이를 바닷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잇는다. 만다라를 그리듯 소금으로 공간 바닥에 그물을 만드는 수행적 작업은 떠 있는 그물을 비추며 서로를 환원적으로 가리킨다.

〈붉은 몸〉(2023-2025)에서 아이슬란드와 한국의 동해안에서 채집된 바다의 소리와 발레리 티 리의 목소리는 공간과 시간을 건너 두 바다를 겹쳐 놓는다. 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작가는 2024년 한국에서 리서치를 시작하며 머물고 있던 네덜란드의 바다와 부산의 바다가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했다. 바다는 간척과 개간의 대상인 한편, 수집과 삶의 장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바다는 전시가 놓인 맥락을 다르게 구성한다. 전시의 제목 ‘우리는 젖은 단어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와 ‘We made the tools to bring wet words home’은 각각 집으로 돌아온다는 귀환의 감각과 도구를 만드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며 거울처럼 작동한다. 언어의 간극은 바다라는 거대한 존재를 경유해 지속적으로 다른 위치의 통로를 만드는 작가의 실천을 환기시킨다.

위상수학에서 손잡이가 달린 컵과 액체를 옮기는 수관은 하나의 구멍이 뚫려 있는 동일한 형상(isotope)이다. 언어와 의미를 만들고 뱉는 인간의 몸 역시 마찬가지로 입과 항문으로 이어진 통로의 위상을 가진다. 통로를 뒤집으면 바깥은 안이, 안은 바깥이 된다. 깊숙한 안쪽처럼 느껴지는 내장에서 발화되는 언어는 우리를 둘러싼 피부와 다르지 않다. 무엇을 담고, 머금고, 옮기는 일, 컴컴한 통로를 지나 어딘가로 연결되는 일은 결국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젖은 단어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는 바다로 이동하는 축축한 포탈과 같다. 통로, 컵, 우리 몸의 안과 바깥은 물로 가득하다.

글. 김재아 (독립 큐레이터) 


작가 | 발레리 티 리 @valerie_tee_lee
기획 | 김재아 @_thebestdriver
그래픽 디자인 | 유혜진 @heyheyhyejin
주최/주관 | 예술공간 [:틈] @art.space.tum

발레리 티 리 《우리는 젖은 단어를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